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것은 거대한 전쟁 장면이나 신화적인 모험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트로이 전쟁을 바라보는 오디세우스의 시선이 어느 순간 달라지는 장면이 더 강하게 다가왔습니다.처음에는 승리를 위해 싸우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긴 전쟁이 어떤 모습으로 끝났는지를 직접 바라본 뒤에는 같은 사건을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이 지점이 놀란이 이번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느꼈습니다.그리고 이 생각은 자연스럽게 전작 오펜하이머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던 한 인간이, 시간이 지나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를 바라보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된다는 점에서 두 작품..
어떤 영화는 보고 난 뒤에도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극장을 나와 한참을 걷다가도 문득 장면 하나가 떠오르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쉽게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이상한 점은 그런 영화 대부분이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별과 상실, 후회와 기다림을 담은 작품일수록 우리는 더 오래 기억합니다. 눈물을 흘릴 것을 알면서도 다시 슬픈 영화를 찾고,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데도 같은 작품을 반복해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이야기가 슬퍼서가 아닙니다. 영화는 타인의 삶을 보여주는 예술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결국 자신의 감정을 만나기 때문입니다.현실에서는 쉽게 울지 못하는 사람도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는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고 감성적이라고 말하지만, 심리학에서..
같은 영화를 나이가 들수록 다르게 보는 이유어릴 때 재미있게 봤던 영화가 시간이 지난 뒤 전혀 다른 감정으로 다가온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인물의 선택이 어느 순간 공감으로 바뀌고, 아무 의미 없이 지나쳤던 장면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기도 합니다.분명 영화는 그대로인데 왜 우리는 같은 작품을 보고도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요?저는 예전에는 영화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영화는 언제 다시 봐도 같은 감동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본 영화들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특히 오래전에 봤던 《8월의 크리스마스》를 다시 보면서 그 차이를 크게 느꼈습니다.20대에는 조용한 멜로 영화 정도로 생각했던 작품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가왔..
솔직히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예쁜 첫사랑 영화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틀었을 때, 화면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복선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건축학개론은 볼수록 "왜 진작 못 봤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영화입니다. 승민과 서연, 둘 다 분명히 좋아했는데 왜 어긋났을까. 그 답이 사실은 영화 곳곳에 다 있었습니다. 영화 속 복선과 상징 — 볼수록 쌓이는 디테일제가 직접 두 번, 세 번 다시 돌려보면서 느낀 건데, 건축학개론의 진짜 재미는 처음 볼 때 보이지 않는 것들에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전람회 CD입니다. 서연이 승민에게 "나중에 이런 데다 집 짓고 살아야겠다, 그때 네가 지어줘"라며 계약금으로 건넨 그 CD 한 장이, 영화 내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다가 ..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극장을 나오면서 든 첫 생각이 "무섭다"가 아니라 "해석하는 재미는 있었는데"였거든요. 인터넷 커뮤니티의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해 A24의 장편 상업 영화가 된 백 룸. 21살 감독의 야심작이 과연 공포 영화로서 제 기능을 했는지, 직접 보고 온 입장에서 정리해 봤습니다. 밈 하나가 영화가 되기까지 2019년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4chan의 초자연 현상 게시판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습니다. 낡고 축축한 카펫, 모노 옐로 톤의 벽지, 끝없이 이어지는 빈방들. 게시자는 "현실에서 노클립(noclip)이 발생하면 백 룸에 떨어진다"라고 적었습니다. 여기서 노클립이란 비디오 게임 용어로, 플레이어가 지형 충돌 판정을 무시하고 벽이나 바닥을 통과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그 게시글이..
영화 눈동자는 단순히 시력을 잃어가는 한 여성의 공포를 다룬 작품이 아닙니다. 이 영화가 진짜 무서운 이유는 보이지 않는 어둠 때문이 아니라, 내가 믿고 있던 일상이 무너지고 더 이상 주변을 온전히 믿을 수 없게 되는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박서진은 점점 시력을 잃어가면서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확인할 수 없게 됩니다. 관객 역시 주인공과 같은 제한된 정보 속에서 이야기를 바라보게 되고, 무엇이 진짜 위험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불안한 상황에 놓입니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시각의 상실을 단순한 신체적 장애가 아니라 인간이 현실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심리적 공포로 확장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영화 눈동자의 줄거리와 원작 줄리아의 눈(Julia's Eyes) 비교, 결말이 의미하는 심리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