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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영화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라는 말에 몹시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갔는데, 상영 내내 웃다가 나오면서 동시에 뭔가 무거운 것을 하나 얹고 나온 느낌이었습니다. 웃겼는데 아팠고, 아팠는데 계속 생각났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 보고 나서 한참이 지난 지금도 몇몇 장면들이 머릿속을 떠다닙니다.
블랙코미디 장르로 읽는 이 영화의 구조
제가 직접 봐보니, 이 영화를 '현실적이지 않다'라고 느끼는 분들이 꽤 계시더라고요. 평생 성실하게 일한 가장이 실직 후 살인을 결심한다는 설정이 와닿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분들 말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처음엔 그 지점에서 잠깐 멈칫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Black Comedy)입니다. 여기서 블랙코미디란 비극적이거나 도덕적으로 불편한 상황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뒤틀린 웃음을 만들어내는 장르를 의미합니다. 짐 캐리 주연의 '뻔뻔한 딕 앤 제인'에서 해고된 부부가 강도질을 하거나, '돈 룩 업'에서 지구 멸망을 방치하는 것처럼, 이 장르에서 극단적 설정은 오히려 장르의 문법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 기준으로 보면 이 영화의 설정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범위입니다.
주인공 유만수(이병헌)는 25년간 제지 회사에서 일한 가장입니다. 자기 취향대로 뜯어고친 집, 대형견 두 마리, 첼로를 배우는 딸, 손예진이 연기하는 아내. 그가 쌓아 올린 것들이 실직 하나로 전부 짐덩이로 뒤집히는 순간, 이 영화의 아이러니(irony)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러니란 겉으로 드러난 의미와 실제 의미가 정반대로 충돌하는 구조를 말하는데, 박찬욱은 이걸 필모그래피 전반에 걸쳐 즐겨 써온 감독입니다.
'어쩔 수가 없다'라는 제목 자체가 이미 그 비틀기를 담고 있습니다. 당연히 어쩔 수 있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스스로에게 '어쩔 수가 없다'라고 되뇌며 살인을 향해 걸어갑니다. 제가 보기엔 이 제목이 주인공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가장 신랄하게 비웃는 말입니다.
한편 이 영화는 2025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고,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한국 대표작으로도 선정되었습니다(출처: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국내 개봉 전 이미 해외 판권 판매로 손익분기점을 넘었다는 점도 이 작품의 완성도를 방증합니다.
- 블랙코미디 장르 특성상 극단적 설정은 장르의 문법이지 결함이 아닙니다
- '어쩔 수가 없다'라는 제목은 주인공을 위로하는 말이 아닌 비틀기입니다
-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아카데미 한국 대표작으로 선정된 작품
- 해외 판권 선판매로 이미 손익분기점 초과 달성
미장센과 구원, 박찬욱이 말하고 싶은 것
저는 박찬욱 감독 영화를 볼 때마다 보고 난 다음 날부터 자꾸 생각이 납니다.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 그리고 이번 '어쩔 수가 없다'까지 전부 그랬습니다. 뭔가를 더 꺼내 보고 싶어서 다시 찾아보게 만드는 영화들입니다. 이번 작품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박찬욱의 미장센(Mise-en-scène)은 이 영화에서도 예외 없이 작동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색감, 소품, 공간, 인물의 위치까지를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연출 방식을 말합니다. 제가 관심 있게 본 부분은 색채 배치였는데, 붉은색은 부정과 욕망, 노란색은 혼란, 초록색은 생명과 집착, 푸른색은 희망을 각각 암시하는 방식으로 쓰인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색의 배치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온실 공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극 중 온실은 아버지가 극단적 선택을 한 장소가 재탄생한 공간으로 읽힙니다. 주인공이 식물을 가꾸며 안정을 찾으려 하는 그 공간이, 사실은 가장 비극적인 기억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염혜란 배우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평소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욕망이 넘치는 요부 캐릭터 '아라'로 등장하는데, 이 캐스팅 방식 자체가 박찬욱 특유의 이미지 역전 전략입니다. 배우가 가진 기존 이미지를 그대로 쓰거나, 혹은 정반대로 뒤집어쓰는 방식. 이번엔 역전의 사례입니다. 그리고 그 효과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저는 앞에서도 늘 '염혜란이 이런 역할을 하면 멋있을 것 같다'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 그게 현실이 되는 걸 직접 목격했습니다.
결말에 대해 '살인으로 구원받는 게 말이 되느냐'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다르게 읽었습니다. 주인공이 찾아낸 자리는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공장에서 혼자 일하는 자리입니다. 사양 산업인 제지업, AI가 대체하는 노동 현장. 이쪽 낭떠러지에서 저쪽 낭떠러지로 옮겨간 것에 불과합니다. 앞마당에는 시체 위에 사과나무가 자라고, 아들은 그걸 목격했으며, 아내는 알면서도 외면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방향은 숙달된 정원사도 마음대로 조정하지 못합니다. 이게 구원이라면, 박찬욱이 말하는 가장 잔인한 종류의 구원입니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영화에서 매력적이고 섹시한 여성 캐릭터들이 거의 다 유부녀라는 사실이 사실 좀 웃기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아가씨'의 히데코, '헤어질 결심'의 서래, 그리고 이번 '아라'까지. 이건 그냥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일관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어쩔 수가 없다, 박찬욱 영화 처음 보는 사람도 재밌게 볼 수 있나요?
A. 충분히 가능합니다. 박찬욱 감독 영화 중에서도 이번 작품은 이야기 구조가 A, B, C, D 순서로 직선적으로 전개되고 꼬는 구간이 없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재밌게 볼 수 있는 편이고, '헤어질 결심'보다 훨씬 보기 편하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다만 블랙코미디 장르 특유의 불편한 웃음에 거부감이 있는 분이라면 취향을 먼저 확인하시는 게 좋습니다.
Q. 결말이 열린 결말인가요, 닫힌 결말인가요?
A. 표면적으로는 주인공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처럼 보이는 닫힌 결말입니다. 그러나 앞마당의 사과나무, 아들의 목격, 아내의 침묵 등 여러 장치들이 이후의 균열을 암시합니다. 닫힌 것 같으면서 실제로는 가장 불안한 형태로 열려 있는 결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쪽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염혜란 배우가 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인가요?
A. 평소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욕망이 끓어넘치는 요부 캐릭터 '아라'로 등장합니다. 박찬욱 감독이 배우의 기존 이미지를 역전시켜 활용하는 방식을 이번에 적용한 사례입니다. 첫 번째 살인 장면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캐릭터 중 하나입니다.
Q. AI, 자동화, 실직 같은 주제가 영화에서 얼마나 직접적으로 다뤄지나요?
A. 꽤 직접적으로 다룹니다. 극 중 거의 모든 인물이 종이 대신 태블릿을 들고 다니며, 사양 산업으로 접어드는 제지업의 현실이 배경으로 깔립니다. 결말부 공장 장면은 AI가 운영하는 무인 공장에서 혼자 일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마무리되어, 이 메시지를 가장 선명하게 전달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실직과 생존이라는 주제가 블랙코미디 형식 안에 촘촘히 녹아 있습니다.
결론
만성 불면증이 있는 분도 극장에서 잠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블랙코미디에 깊이 몰입해서 러닝타임 내내 즐겼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입니다. 박찬욱의 맛이 맞는 분에게는 올해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촘촘한 경험이 될 것이고, 맞지 않는 분에게는 길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보고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잔혹하지만 웃기고, 웃기지만 아프고, 아프지만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보고 난 다음 날부터 자꾸 생각이 납니다. 박찬욱 영화는 큰 스크린으로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말이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가능하면 여러 사람과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코미디 장면의 폭발력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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